사회복지정책의 역사(5)
4) 1935년 미국의 사회보장법
1929년에 촉발된 대공황으로 심각한 경제위기가 계속되던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이른바 제1차 뉴딜이라고 분린 일련의 위기극복 정책을 폈다. 통화의 흐름과 외환거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함으로써 국민의 은행에 대한 공포, 즉 예금의 인출 사태를 수습한 긴급은행법, 농산물 가격을 인상하기 위해 경작 면적과 생산량을 줄임을 써 몰락한 농업부문을 회생시키기 위한 농업조정법, 최저임금과 최대 노동시간 및 가격 고정에 관한 기준을 정하여 '상품가격 인하 : 임금 삭감'이라는 악순환을 종식하기 위한 산업부흥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1935년 5월 27일, 검은 월요일, 대법원이 NIRA를 위헌이라고 판단함으로써 결정적인 위기에 빠졌다. 이로써 루스벨트는 제1차 뉴딜의 귝가통제계획상사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대신 정부가 대기업의 독점을 막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호하였다. 다시 말해, 위헌 결정을 계기로 정부의 산업 정채 이 경기 회복과 사회개혁을 도보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가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더욱 진보적인 색채를 띤 이른바 제2차 뉴딜이 시작되었다. 제2차 뉴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와그너 법(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한 노동법)과 사회보장법이었다. 뉴딜과 조직노동이 서로 정치적 동맹을 맺는 데 기여한 사회보장법은 미국 최초의 방정부 차원의 복지 프로그램이었으며, 명실상부하게 미국 사회보장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이 법은 ① 연방정부가 관장하는 노령보험, ② 주 정부가 관장하고 연방정부가 재정을 보조하는 실업보험, ③ 주 정부가 관장하고 연방 정부가 재정을 보조하는 실업보험, ③ 주 정부가 관장하고 연방정부가 재정을 보조하는 공공부조와 사회복지서비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회보장법의 성격은 1934년 6월 루스벨트가 의회에 보낸 사회보장에 관한 교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거기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헌법이 경제적 안정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가정의 보장, 생활의 보장, 사회보험의 보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경기 회복과 병행해서 사회재건이 추진되어야 하고 사회재건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시민의 생활보장'이며, 생활보장은 주택과 고용기회 그리고 생활변동에 대한 대비책에 달려있고, 그 같은 대비책으로 사회보험과 공공부조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회보험의 기본 방침은 ① 여러 종류의 사회보험을 하나로 묶어 포괄적인 제도를 수립하고, ② 사회보험의 운영은 주와 연방정부의 어느 한쪽이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긴밀한 협조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③ 필요한 재원은 일반조세 수입이 아니라 보험료(사회보장세)로 조달하고, ④ 연방정부가 기본적인 보험적립금을 관리하고 전국적인 사회보험을 만든다는 것 등이었다.
이 같은 기본 방침 하의 1934년 6월 작업기구로서 경제보장위원회(노동장관 퍼킨스가 위원장, 위원으로 재무장관 등 4명의 각료급 인사가 임명)가 설치되었다. 그해 8월부터 실업 보험, 노령연금, 건강보험 등의 사회보험과 기타 공공부조를 포괄한 사회보장제도 전반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쟁점이 된 것이 실업보험이었다. 즉, 운영의 책임을 연방정부가 전담하는가 아니면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분담하는 가하는 것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사실 전국적으로 단일한 제도를 수립한다는 원칙에 따르자면 연방정부가 운영의 책임을 져야겠지만, 이는 연방정부의 권한 확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긴밀한 협조의 원칙에는 어긋났다. 그런데 주와 연방정부가 운영을 분담하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업보험을 목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되 연방정부가 그것을 모두 징수한 다음 각 주에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연방정부가 세금을 징수치 않고 일정한 기준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는 제도를 수립한 주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줌으로써 주 정부가 그것을 징수 · 관리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판결 위헌 결정을 두려워한 경제보장위원회는 후자, 즉 세금면제에 입각한 연방정부와 주 정부 간의 협력 방식을 채택했다. 이같이 연방의 권력을 되도록 제한하면서 각 주가 독자적으로 실업보험제도를 시행토록 한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연방법에서는 실업보험을 목적으로 하는 세금과 그것을 운영할 연방기구에 관해서만 규정하였고, 피용자와 주 정부의 기여금, 실업수당의 급여기준, 기금의 형태 등 세부적인 것은 각 주위 입법 사향으로 넘겨졌다. 결국 미국의 실업보험은 주별로 다양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
반면에 노령연금은 쉽게 합의에 도달했다. 노령연금의 재원은 전국의 사업주에겍 급료총액의 2.5%에 해당하는 사회보장세를 부과하고, 피용자에게도 같은 부담, 즉 임금의 2.5%를 갹출시켜 마련하였다. 재무부는 이 돈을 양노적립금으로 징수하고, 피용자가 65세에 달하면 노령연금을 지불하는데 그 액수는 퇴직자의 퇴직 전 소득에 비례하도록 하였다.
한편, 모겐타우 재무장관은 연방정부의 재정지원방식에 제동을 걸어 세율을 처음부터 고용주, 피용자 각각 3%로 하되 처음 1%에서 12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3%로 인상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원인은 처음 1%에서 20년에 걸쳐 2.5%로 인상) 그렇게 함으로써 연방 정부의 지원이 필요치 않게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모겐타우의 수정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적용대상에 피보험자의 부양가족이 배제되고, 농업노동자, 가사종사자, 종교, 자선, 교육 분야 종사지 및 자영업자도 적용 범위에서 제외되어 노동인구의 약 절반만이 수혜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급여 수준도 낮아 노령부조의 급여액보다 적은 경우도 있었다.
경제보장위원회는 공공부조 분야에서도 쉽게 결론에 도달했다. 공공부조의 대상을 65세 이상 노령의 빈민, 시각장애인, 요보호아동으로 하고, 각 주가 공공부조 제도를 수립하면 그 재정의 1/3에서 1/2을 연방정부가 보조하고, 신체 장애아동, 고아 신생아와 산모를 위한 주 정부의 공공부조에 대해서도 연방정부가 주 정부에 보조금을 교부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3세기를 이어온 구빈에 대한 지방책임이라는 빈민법적인 원칙은 폐기되고, 주 정부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정책이 항구화되었다. 말하자면 미 역사상 처음으로 구호가 연방예산의 주요 항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보험은 의사집단과 보험회사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제외되고 말았다. 건강보험이 만들어지면 의료수 등 여러 가지의 이해가 정부에 의해 통제받을 것을 두려워한 미국의 의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집단인 전국의사협회를 중심으로 저지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의회에 대해 건강보험에 대해 더 연구할 시간을 달라고 하는 한편, 건강보험이 사회보장법안에 포함되면 의회가 법안 전체를 거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건강보험이 정부의 사회보험 영역에 포함되면 자신들의 시장을 잃게 되는 민간보험회사들도 반대에 앞장섰다.
1935년 1월 동 법안이 경제보장위원회로부터 의회에 상정되자, 각 집단은 반대 관점을 표명하였다. 특히 의회의 보수적인 의원들은 사회보장제도가 경기 회복을 저해하고 노동자를 국가의 노예화하는 사회주의적 통제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대체로 여론은 이 법안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대공항 이후 거의 5년 동안 유례없는 빈곤에 시달려 왔던 대부분의 미국인은 생활 보장을 전실이 원했던 것이다. 1935년 6월 19일 동법안은 76 대 6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상원을 통과하였다. 그해 8월 14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역사적인 사회보장법은 발효되었다.
루스벨트 정부의 사회보장법은 미국의 사회복지 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 이전까지 미국인에게 자유주의 또는 개인주의는 삶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며,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사회경제생활에 간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던 미국인이 1930년대 중반에 정부의 간섭을 수용한 것이다. 그 계기는 바로 1929년의 대공항이었다.
대공황은 시민들의 경제적 생존권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나 이런 총체적 위기에 대응함이 있어 개인주의적 자유기업 체제는 매우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경제의 자동회복력'의 관념에 입각한 개인주의적 경제사회정책에 대해 재검토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극적인 관념의 변화 사회보장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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