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상과 사회복지정책(1)
사회복지정책의 이념, 즉 사회복지사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페이비언 사회주의, 국가 개입주의 (케인스주의), 신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네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페이버언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로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지양(극복 또는 페절)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입장이 같다. 그러나 페이비언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안에서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적 사회복지정책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다.
한편, 국가개입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경제사회체제로 안정하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번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그렇지만 국가개입주의가 자본주의의 유지 발전과 위기극복을 위해 사회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는는 반면 신자유주의는 사회복지정책을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간주한다. 이러한 네 가지 사회복지사상의 특징을 요약하면 과 같다.
1. 페이비언 사회주의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영국의 독특한 실용주의적 · 점직적 사회주의로서 1884년 설립된 영국 페이비언협회에 기원을 두고 있다. 페이비언이란 이름은 포에니 전쟁(기원전 2~3세기에 걸친 로마와 카르타고의 세 차례 전쟁) 때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격파한 로마의 파비우스 장국의 이름을 딴 것인데, 막강한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로마를 구한 것은 전면전보다는 신중한 태도와 접전의 회피였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사회주의에로의 진전을 위해서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지연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버나드 쇼, 시드니와 비어트스 웹 부부, 토니 등 개명한 인텔리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1915년 노동당 노팅엄 전당대회에서 당 강령 작성에 시드니 웹이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노동당의 기본 노선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노동당이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력한 이념이 되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사회적 선을 추구하고 달성하는 데 있어 국가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후술할 국가개입주의와 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수정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국가개입주의와 다르다. 이 점에서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마르크 주의와 입장이 유사하다. 하지만 프롤레타아트 독재와 계급혁명을 부정하고, 평화적(입헌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입장이 갈린다. 그리고 이들은 계급전쟁보다는 윤리와 공리주의를 더 중시했다.
이들은 평등, 자유, 우애,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와 같은 프랑스 혁명 후 등장한 시민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를 선봉 한다. 민주주의는 평등과 자유의 소산이고, 인도주의는 평등과 우애의 소산이다. 특히 이들은 평등을 강조한다. 평등이란 사실상 모든 사회주의 원칙 중에서 가장 강한 윤리적 영감이 되어 왔으며, 평등주의 없는 곳에서 사회주의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통합을 중시한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뿌리를 둔 계급갈등을 사회통합의 가장 큰 적이며, 따라서 불평등은 사회통합을 위해 완화되어야 한다. 동시에 불평등은 비효율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첫째, 자유시장체제는 요구가 없는 수요에 응함으로써 불필요한 생산을 초래하고(예 : 모든 사람을 위한 빵보다는 특정인을 위한 고급과 자와 서민을 위한 주택보다는 부유층을 위한 요트와 롤스로이스를 생산한다) 둘째, 지배계급이 세습적이고 자기 영속적이 되고 재능 있는 자의 지위 상승을 막아 능력의 낭비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또 사회정의 이념에 손상을 준다. 그 이유는 첫째, 교육기회의 불평등이 아동의 자연적 재능에 따라 사신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자연권을 파괴하고 둘째, 불평등 자체가 비도덕적이 보상과 특제체제의 산물이며, (우연적인 출생과 가문의 산물) 셋째,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주의자에 있어 평등은 기회의 평등 이상을 의미한다. 토니는 기회의 평등이란 무능력의 해소와 능력의 창출에 좌우되나 어떤 자는 환경의 혜택을 크게 받는 반면 어떤 자는 오히려 환경에 의해 자신의 능력을 삭감당하기 때문에 기회의 평등이란 고상하지만 실현이 희박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크로슬랜드 역시 기회의 평등이 사회주의자의 입장의 보면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평등은 소득의 평등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합당한 대책이 마련될 때 특별한 책임은 특별하게 보상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과다한 책임과 특별한 재능은 차등적 보상을 요구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소득의 평등을 기하기 위한 조치가 자유주의 사회에 있을 수 없는 어떤 규제(공산주의)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소득의 평등보다는 부의 평등을 주장한다. 부의 불평등은 세 가지 이유에서 불평하다, 첫째, 불평등이 노력이 아닌 상속된 재산으로부터 발생하거나 둘째, 능력의 차이보다는 기회의 차이를 반영하거나 셋째, 조세제도에 의해서 불평등하게 취급되는 경우이다. 특히 세습된 부로부터 생기는 불평등은 가장 비난받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들은 자유를 신봉한다. 그런데 이들의 자유는 자유주의들의 자유와 달리 정부의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이다. 법, 경제정책, 사회복지정책, 재정정책을 통해 개인의 자유는 신장된다. 그리고 자유는 평등에 달려 있다. 권력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자유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들은 우애도 강조한다. 경쟁보다는 협동, 권리보다는 의무, 개인의 요구보다는 공동체의 선, 자조보다는 이타심을 더 중시한다. 토니에 있어 사회주의의 정수는 출세의 관념으로부터 봉사의 관념으로 대치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복지국가 성립 후 이론적 · 정책적으로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주도한 Titmuss의 주저 『증여관계』의 주제가 이타주의와 자신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여였다.
복지국가에 대하여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열렬한 찬성과 지지를 표명한다. 이들은 점진주의와 침투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개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접근의 결심이다. 복지국가의 전통은 영국의 노동당 정책 중 가장 깊숙이 깔려 있는 정강이다. 이를 복지국가주의라 한다.
이들의 복지국가관은 기복적으로 실용주의적이다. 복지국가는 실제 문제에 대한 논리적 반응로서 산업화, 도시화, 기술변동,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복지국가의 과도한 재정지출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 이들은 복지국가란 산업사회의 문제와 욕구에 대한 실용적인 대응책이라고 응수하였다. 그리고 사회적 지출의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를 중시한다. 복지비란 소비가 아니라 투자이다. 예컨대, 실업급여와 부가급여는 기술과 산업의 변화에 대한 대응책임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Titmuss는 사회복지정책의 기능으로 사회통합, 공동체 의식의 강화, 이타주의 의식의 유지를 들었다. 특히 그에 있어 사회통합은 중심 사상이었다. 사회복지정책이 기능으로 재분배도 매우 강조되었다. 사회복지정책을 통한 재분배의 효과는 그 크기보다는 아주 사소하고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주요한데, 이러한 재분배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파괴적인 무능력과 추악한 특권을 분쇄하고, 노동의 대가인 화폐임금과 함께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사회적 임금을 향유할 수 있게끔 보장한다. 경제성장은 무상교육을 통한 교육기호의 재분배를 필요로 하고 사회의 복지는 청년에서 노인으로 직업인에서 실업자로, 건강한 자에서 환자로, 자녀가 없는 부부에서 자녀가 있는 가족으로 다양한 형태의 소득재분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복지국가는 이들의 눈에는 매우 미흡한 것을 비췄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목표는 열렬히 지지하였으나 그 한계와 위험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현실의 복지국가가 시민의 권리 확립보다는 경제성장의 특별한 예속물로 전락했고, 경제적 특권을 뿌리를 손대지 못했으며, 부 · 소득 · 기회의 재분배를 이루지 못했다는 비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은 모두 기술적인 것이다. 사회복지정책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한 연장이 결여되어 있고, 목적이 불분명하고 조정이 불충분하며. 문제 낮은 경제성장률에 있다는 주장은 복지윤리와 자본주의적 가치관에는 근본적인 갈등이 없다는 것을 뚯한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에게 복지국가는 사회주의를 향한 불안전한 타협이며 디딤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