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911년 영국의 국민보험법
1911년에 영국의 자유당 정부가 제정한 국민보험버은 건강보험과 실업보험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 자유당 정부의 개혁을 주도했던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의 합작품이었다. 국민보험의 제1부이자 로이드조지가 '앰뷸런스'라고 부른 건강보험은 공제조합, 보험회사, 의사 등과 같은 강력한 기득권 집단들과의 장시간 협상을 거쳐 탄생하였다. 이미 조합원들에게 의료급여를 제공하고 있었던 공제조합은 국가의 건강보험이 자신들의 사업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보아 극구 반대했다. 결국 정부는 공제조합에 건강보험운영을 맡김으로써 이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공제조합에 건강보험의 운영구넝르 부여하자 유사업체인 보험회사에서 가만히 있질 않았다. 사실 보험회사의 수많은 인력은 건강보험을 운영하기에 충분했고, 보험회사는 건강보험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는 데 유리했다. 국가 입장에서도 이들 보험회사를 끌어들인다면 건강보험의 운영을 위해 별도의 운영기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보험회사들은 로이드조지에게 실업 보험상의 미망인급여와 고아급여를 폐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 급여가 그들의 보험상품의 하나인 사망보험과 경쟁 관계에 놓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의 로이드조지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보험회사의 반대를 달랠 수 있었다.
의사들도 목소리를 냈다. 당시 의사들은 대부분 공제조합과 계약하에 진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항상 공제조합은 진료비를 깎으려 했고, 이에 의사들의 분만은 컸다. 그러므로 국가가 관장하는 건강보험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국가 의료로 편입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영국의학협회는 건강보험의 대상을 빈민법 대상 이상에서 일정 소득(연 소득 백 파운드) 이하인 사람(절대 빈민 이상 상층 이하인 사람)으로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여하튼 협상 끝에 연 소득 250파운드 이하 16~70세의 모든 육체노동자와 연 소득 160파운드 이하의 비 육체노동자가 건강보험의 대상자가 되었다. 보험료는 주당 피용자가 4펜스, 고용주가 3펜스, 대장성이 2펜스를 부담하고, 운영은 공제조합 중 정부가 공인한 조합이 맡고, 피보험자에게 조합 선택을 부여했다. 가입은 의무적이었고, 국가는 감독권을 행사했다. 말하자면 국가가 국민에게 의료서비스와 질병 급여를 직접 제공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자신의 힘으로 의료서비스와 질병 급여를 받도록 강제한 셈이었다. 상병수당은 주당 10실링, 장애수당은 5실링. 출산수당은 30실링이었으며, 피보험자(가입자 본인, 부양가족은 제외)는 지역 보험위원회의 사명 부에서 의사를 선택하여 무료로 진료를 받게 되었다. 의사들은 자신의 명부에 등록된 피보험자의 수에 비례하여 진료비를 받았다.
국민보험의 제2부는 실업보험이었다. 실업보험은 처칠이 주도했다. 처칠은 당시 실업문제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던 베버리지의 도움을 받아 실업보험을 입안하였다. 건강보험이 관련 이익집단들 때문에 상당한 진통을 겪은 반면 실업보험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건강보험은 독일의 전례가 있지만 실업보험은 생소한 분야였다. 영국에서는 실업기금을 가진 노조가 일부 있었을 뿐이었다. 먼저 실업 사태에 직면할 가능성이 많은 특정한 산업 분야에 한정하고, 갹출방식으로 하며, 국가가 보조한다는 큰 틀이 짜였다. 급여액과 보험료 간의 관계, 정액제와 소득 비례제 등 여러 쟁점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업의 책임이 자신에 있는 사람의 실업급여를 회수해야 하는가의 여부였다. 이에 대한 로이드조지와 윈스턴 처칠의 입장은 명확했다. 실업급여와 실업의 책임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사회보험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수학의 문제였다. 이런 이들의 견해는 영국 사회보험의 고전적 원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베버리지는 보험료에 비례하여 급여가 정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의견은 법안에 반영되었다. 그리하여 주당 실업급여액은 5주간 불입한 보험료에 상당하도록 정해졌고, 대상은 경기변동에 민감한 산업인 건축, 토목, 조선, 기계, 철강, 자동차, 제재 업 등이었으며, 보험료는 고용주와 피용자가 각각 25펜스씩 부담하고, 대장성이 고용주와 피용자 보험료 합께액의 1/3을 보조하도록 하였다. 실업수당은 성인 남성의 경우 기본 액이 주당 7실링이었고 그 이상은 보험료에 비례하고, 최고 15주간 지급되도록 하였다. 당시 직업소개소 법에 의해 신설된 각 지역의 직업소개소들이 실업수당 지급 실무를 담당했고, 실업수당 청구인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청구인의 진실성을 조사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한편, 자유당 정부가 국민보험의 도입에 앞장섰던 이유는 독일제국과 같이 사회보험이 사회주의에 대한 방파제가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회보험의 반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장 잘 간파한 자유당 각료가 처칠이었다. 그는 사회보험의 도입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독일의 비스마르크 사회입버이 사회주의를 부드럽게 죽이기 위해 마련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사회보험을 포함한 자유주의적 사회개혁의 부자와 시민 사이의 양극화를 막아 주어 사회를 공고히 하는 피라미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 개혁파인 로이드조지와 윈스턴 처칠에게 사회보험은 급여 측면에서도 자신들의 관념과 잘 부합되었다. 즉, 피보험자가 갹출한 돈으로부터 급여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급여 권리를 획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떳떳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선호해 온 빅토리아적 자조의 미덕에 잘 합치하였다. 로이드조지는 사회보험을 강제적인 자조로 간주했다. 따라서 급여 수준은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만큼 충분해서는 안 되었다. 국가 부담도 적어야 했고, 재정은 노동자와 그 고용주가 주로 부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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