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일제국의 사회입법
1883년에 제정된 독일 제국의 건강보험은 세계 최초의 사회보험이다. 독일제국은 건강보험의 관리운영을 위해 국가의 중앙집중식 기구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이미 질병 급여를 제공하고 있었던 기존의 길드, 공장 기업 및 상호부조조직(공제조합)을 중심으로 건강보험조합인 질병 금고를 만들었고, 이와 별도로 소매업자를 위한 지역 질병 금고와 여기에 가입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교구 금고를 만들었다. 보험료는 통상 노동자가 2/3, 노동자가 1/3을 분담토록 했다. 그리고 모든 금고 해당 조합원들의 대표들이 통제하도록 했는데, 노동자와 고용주는 분담 비율만큼의 대표를 규구금고는 에서 선출된 대표를 보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1884년에는 산재보험 법이 제정되었다. 비스마르크 사회보험 중에서 논란이 가장 심했고 또 비스마르크가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것이 산재보험이었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에서 앞서 1880년에 논읜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비스마르크는 ① 강제보험, ② 제국보험공단의 중앙집중식 통제, ③ 민간보험회사의 배제, ④ 국가보조금의 지급 등 몇 가지 기본적인 방침을 세워 이를 관철하고자 했다. 이런 방침에는 산업재해의 보상책임을 자본가가 아닌 국가가 지고, 국가의 직접적인 보조가 필요하며,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 즉 민간보험회사가 국가의 책임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그의 의지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는 특히 국가보조금 지급을 중시했는데, 노동자에게 국가가 직접 보조금을 지급해야만 노동자가 자본가가 아닌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또 그래야만 국가에 통합된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산재보험 법의 초안에 의하면, 연 소득 750마르크 미만의 노동자는 보험료가 면제되고, 연 소득 750~1,500마르크의 노동자는 보험료 1/3, 그리고 연 소득 1,500마르크 이상의 노동자는 1/2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법안은 좌우 양쪽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에 봉착하였다. 노동계의 좌파지도자들은 산재보험이 노동운동의 자유에 강철 족쇄를 채우려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산재보험이 노동자를 국가복지의 노예를 만드는 병영사회주의라고 맹공격하였다. 반면에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들은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이 국가의 권력 강화와 관료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국가 보조는 그만틐 노동자들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자본가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결구 이 법안은 부르주아지들이 장악한 의회를 통과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중앙집중식 통제와 국가보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도 보험조직의 일정한 관리 책임 권한을 공유하길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국가가 직접 통제하고 모든 생산적인 계급들이 참여하는 조합주의 조직을 만들길 원했는데, 이 조직은 점진적으로 의회를 대신하거나 의회와 함께 입법권을 공유하는 대의기구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되면 국가는 손쉽게 모든 계급을 통제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이런 의도를 간파한 의회가 이를 찬성할 리가 없었다.
1884년에야 제국의회를 통과한 산재보험 법은 노동자들은 완전히 배제한 채 자본가들이 산재보험의 조직을 장악하도록 만들어졌다. 대신 자본가들은 제국보험공단의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만 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들로서는 가장 중시한 산재보험에 대한 통제권만큼은 확보할 수 있었다.
다음은 연금이었다. 연금은 건강보험과 달리 장기보험이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연금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연금, 즉 노령페질보험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고자 했다. 그는 적은 금액이지만 국가의 연금을 받는 국민이 많다면 이들로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89년 제국의 회를 통과한 노령페질보험에서도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관철하지 못했다. 즉, 그의 집요한 요구였던 직접적인 국가 보조에는 성공했지만(재무성이 지급하는 50마르크의 정액 기초연금), 전술한 조합주의적 조직을 강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노령페질보험은 노동자와 고용주가 파견하는 동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관리기구가 운영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재정은 노사 양측이 각각 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한편, 사회보험이 현재는 농민과 도시자영업자를 포함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시행 초기에는 임노동자, 특히 육체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가 주된 대상이었으며, 자본제적 생산양식에서 방생한 문제인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책이고, 그 재정을 노동자와 자본가가 공동 부담한다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자본주의 사회복지정책이다. 그런데도 1880녀대에 후발 공업국이었던 독일제국이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던 대영제국보다 거의 한 세대 앞서 사회보험을 시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19세기 말 독일제국의 계급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이센은 1866년대 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년대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정치적 대승리를 발판으로 봉건적인 융커계급은 신흥부르주아지들의 거센 도전, 즉 권력 분점 요구를 억누르고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국 내부에서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의 세력확대와 정치적 진출이 두드러져 융커계급과 신흥 부르주아지 등 지배층들이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비스마르크는 영토적 통일에 이어 독일 민족의 내부적 통일, 즉 사회통합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이른바, '채찍과 당근' 정책에 착수하였다. 채찍이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 책을 말하고(즉, 반사회주의법), 당근이란 노동자계급을 국가 내로 통합시키기 위한 일정한 양보를 의미하는데, 사회보험이 바로 당근이었다.
비스마르크 사회보험은 재정을 주로 자본가계급에 부담시키면서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융커가 헤게모니를 쥔 국가로 유도하고 사회보험기구 속으로 모든 계급을 편제시켜 의회를 무력화시키려는 고등전략이었다. 이런 점에서 비스마르크 사회보험을 코포라티즘의 원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따라서 전술한 대로 부르주아지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다만 비스마르크의 군사적 성공에 압도당한 부르주아지들로서는 사회보험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계급역량이 강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사회보험의 도입은 수용하되 그 관리운영의 주도권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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