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정책의 역사(6)

4. 복지국가 시대

  제1 ·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과 함께 시민계급의 힘이 강해졌고, 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국가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복지국가가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 처음 등장하여 점차 서유럽 전체로 확산된 복지구각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시장의 불평등과 불안정성에 대항하여 사회적 연대와 소득과 부의 평등,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공동체의 보장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사회복지의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었고, 소득보장은 물론 보건의료, 주택 교육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이 다양화되었으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재정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복지를 자비나 은전이 아닌 시민의 권리로 인정하면서 사회문제의 해결보다는 욕구의 충족을 중시하게 되었다. 복지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세계적인 호황(자본축적과)과 시민계급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어 꾸준히 확대 · 발전하였다.

  한편, 복지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도 사회보험이 복지국가의 핵심 제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보험과 복지국가는 중첩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회보험의 대상이 화이트칼라와 자영업자로 확대되어 노동정책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상실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복지정책으로 성격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 베버리지 보고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세계적인 전쟁 영웅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의 애틀리가 이끈 노동당이 이기고 집권하였다. 애틀리와 노동당은 베버리지보고서에 입각하여 기성복 만들 듯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에게 베버리지 보고서는 복지국가와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서독, 스웨덴 등 서유럽 복지국가의 기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서유럽 복지국가의 청사진이 되었다.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 즉 베버리지 위원회는 영국 노총(TUC)이 연립 정부의 전후 사회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던 노동당 소속 무임소장관 그린우드에게 권고하여 만들어졌다. TUC는 그린우드에게 기존의 국민보험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정부 각 부처 고위 관료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TUC는 전후방 없이 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된 전쟁에서 병사들과 시민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종전 이후 국가재건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위원회는 1941년 6월에 창설되었다. 런던경제학교 학장을 그만두고 노동성 촉탁으로 일하고 있던 실업보험 전문가 베버리지가 의장으로 천거되었고, 정부 각 부처 소속 고위 관료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처음 베버리지 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만 해도 2년 후 자신들의 활동 결과 보고서가 그렇게 엄청난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베버리지 위원회는 부분적으로 이미 폐지된 왕립노동자보상위원회의업무를 계승하고, 또 부분적으로 전전에 엉성하게 끝난 건강보험 정비 작업을 마무리하며, 또 부분적으로 전쟁 발발 직후부터 점차 거세진 가족수당 요구를 대장성이 회피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베버리지는 보고서에서 기존의 모든 사회복지제도를 다루고자 했고, 전후 재건 계획의 청사진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위원회의 민간인자문의원들의 활동도 미미하였다. 기껏 자문한 내용은 주로 기술적인 문제들, 예컨대 미혼모와 버림받은 아내를 어떻게 사회보험에 가입시킬 것인가, 지역별 차이가 심한 사회경제적 수준을 어떻게 최저생계비 개념에 반영할 것인가 등등이었다. 그런 점에서 베버리지 보고서는 베버리지 한 사람의 작품에 가깝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1942년 9월 완성되었다. 그러나 발간은 동년 12월로 연기되었다. 이유는 일부 각료들이 그 내용이 지나치게 혁명적이라 하여 반대햤기 때문이다. 베버리지 보고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시민들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전후 새로운 사회질서, 즉 새롭고 더욱 평등한 영국의 청사진으로 간주하였다. 대중 신문들은 베버리지 계획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보장이라 표현했다. 보고서가 발간된 직후 시행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95%의 응답자들이 보고서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90%가 보고서 내용에 찬성하고 있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정부 간행물임에도 불구하고 발간된 지 한 달 만에 10만 부가 판매되었으며, 그 후 모두 63만5천 부나 팔렸다고 한다. 곳곳에서 심지어 군 내무반에서도 사회보장에 관한 주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베버리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에서 출발했다. 첫째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되 분파적 이해는 무시한다. 그는 1911년의 국민보험법이 여러 이익집단 간의 타협 산물이었고 또 그러한 타협이 결국 쉽지가 않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인 지금은 그런 이해관계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 둘째,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5대 악을 극복해야 한다. 5대 악의란 결핍, 질병, 무지, 나태를 말한다. 그의 계획은 이 중 우선 결핍에 초점을 맞추고 소득보장을 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진보를 향한 포괄적인 정책 일부에 불과했다. 셋째, 사회보장은 국가와 개인의 협력을 통해 달성된다. 국가는 사회보장을 자산조사 없이 하나의 권리로 제공하고 그 외는 국민이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리고 베버리지가 제안한 것은 보편적이고 통일된 사회보험체계였다.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시민을 포함하고, 대상자 집단을 경제적 곤란의 원인과 그 보호방법에 따라 분류한다. ② 사회보험의 성공을 위해서는 세 가지 기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즉, 포괄적인 보건서비스, 완전고용이 그것이다. 가족수당은 가족의 크기와 소득을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하고, 보건서비스는 치료적일 뿐만 아니라 예방적이어야 했다. 실업은 실업수당의 비용과 그에 따른 임금 손실을 감안하면서 가장 낭비적인 문제이므로 완전 고용은 매우 긴요한 전제조건이었다. ③ 연금은 자산조사 없는 정액제에 최저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④ 재정은 피보험자, 고용주 및 국가(재정의 1/6)가 공동 부담한다. ⑤ 소득의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정액의 보험료를 낸다. ⑥ 사회보험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근대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공공부조가 담당한다.

  베버리지 이념의 핵심은 보편주의였다. 보편주의는 모든 시민을 포함하고 같은 급여를 제공하며 빈민에 대한 자산조사의 낙인을 없애자는 관념으로 전쟁 기간 중 새로이 형성된 평등 정신을 담고 있었다. 또 하나의 핵심 이념은 국민 최저, 또는 최저생계비 원칙이었다. 사회보험이 시민들의 자조 관념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면 급여는 단지 기본적 욕구만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다.

  베버리지 정책은 혁명적인 게 결코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복지정책을 내놓은 것 아니라 기존의 분산된 사회복지제도들을 무시하지 않고 정비하여 새롭게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전과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잘 절충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가 이전까지는 부자들만의 특권이었던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부여하고 또 가난의 공포로부터 해방해 준다는 베버리지의 의도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복지저도을 폐기하지 않고 합리화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T. H. Marshall은 진화적 과정을 거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과거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나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1940년대의 낡은 기구들, 즉 중앙정부, 지방정부, 기타 공적 특별기구들을 정비함으로써 복지국가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조용한 혁명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또 A. Briggs는 베버리지가 "전전이 곧 무너져 내릴 듯한 사회보장 구조물을 놀라울 만큼 견고한 기초를 지닌 건축물로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한 바 있다.